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혜진, EBS PD) 안녕하세요, 저는 '여성백년사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EBS 이혜진 PD입니다, 반갑습니다.
'여성백년사'는 특별하게 시작을 합니다.
패널들이 분장실로 보이는 방에 갇혀서 퀴즈를 푸는데요. '여성백년사'는 이렇게 1920년대, 30년대 인쇄 매체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입니다.
당시 왜곡된 여성관을 그저 비판하고자 만든 콘텐츠는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백 년 전과 현재의 간극 사이에서 제가 너무 희망을 찾고 싶어서 시작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저는 과연 희망을 찾았을까요 아니면 더욱 더 큰 절망에 빠졌을까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이 프로그램을 제가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는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아주 저연차 PD였을 때부터 '내가 평생 다큐멘터리를 딱 한 편만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주제로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좀 했던 것 같습니다.
EBS에는 정말 훌륭한 다큐멘터리들이 많지만요. 사실 PD 개개인으로 보면 장기 다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자주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기회가 나한테 왔을 때 나는 과연 세상에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 그걸 고민해 봤을 때 저에게 정답은 '여성의 역사'였습니다.
왜냐면 제가 대학 시절에 과제를 하면서 읽었던 어떤 글이 되게 오랫동안 제 가슴 속에 남아있었거든요.
그걸 하나 소개를 해드리면 나혜석이 쓴 '이혼 고백서'라는 글 중에 한 문장인데요.
"나의 외침으로 먼 훗날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저는 이 말이 되게 좋았어요.
왜냐면 자기가 이혼을 하게 된 과정 그리고 감정을 써내려가면서도더 후대의 여성들을 생각했다는 그 부분이 굉장히 멋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른바 신여성들이 남긴 글들을 보면서 어떤 부분은 '참 여전하다' 싶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굉장히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글을 읽으면서 같이 분노하기도 하고 또 응원하는 마음을 갖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그리고 저 시절에 어떻게 저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때 느꼈던 감동이나 깨달음을 시청자분들과 좀 나누고 싶었어요. 그 기억으로 만들게 된 프로그램이 바로 '여성백년사'입니다.
'여성백년사'에는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폭력 피해를 입고서도 '나쁜 피'라고 손가락질 받는 와중에 글을 써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작가 김명순,
그리고 조선 최초로 단발 머리를 했던 강향란, 그리고 데파트 걸이었던 기자 송계월 등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아냈던
여성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이 바로 '여성백년사'입니다.
흔히 역사 다큐멘터리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보통은 사료가 좀 나오고 전문가 인터뷰가 나오고약간의 재연 드라마들이 나오죠.
'여성백년사'의 포맷은 그와는 조금 다릅니다. 여러 가지 설정과 장치가 좀 들어가 있는데요.
현대를 살고 있는 방송인 네 분과 백 년 전에서 온 여성들이 서울역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컨셉을 취합니다.
처음에 방송인 분들 진행자분들을 섭외하려고 전화를 해서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도무지 쉽지가 않은 거예요.
"100년 전의 여성을 만나서 선생님께서 대화를 나누시면 돼요"라고 했더니 "전 연기는 못해요" 이런 대답이 오기도 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100년 전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는 컨셉을 정했을 때 제 마음이 어땠을 것 같으세요? "
이 세상에 없는 걸 내가 창조해 냈다 역시 난 짱이야!" 이랬을까요?
전혀 아니고 너무너무 큰일이 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 요즘 시청자들 눈이 너무 높아서 조금만 삐끗하면 오그라든다고 안 볼텐데 내가 가진 작고 소중한 예산으로 사람들이 몰입하게 연출할 수 있을까?
이런 것 때문에 엄청 겁이 났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컨셉을 밀고 나갔던 건 제가 정말로 100년 전 여성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응원도 해주고 위로도 해주고 싶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분들도 저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랐습니다.
'여성백년사'의 최초의 제목은 사실 좀 별로긴 하지만 '100년 전 여성에게 묻는다' 였어요. 제가 실제로 묻고 싶었던 것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누구나 살면서 부당하다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오잖아요.
그럴 때 다들 어떻게 대처하시는 편이세요? 저는 제가 불의에 맞서 싸우는 엄청 멋진 어른으로 클 줄 알았는데 막상 사회 생활을 해 보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상황을 모면하는 데 바빴고요. 비겁하게 도망친 적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부당한 순간을 딱 맞닥뜨리면 처음에는 분노랑 불쾌감이라는 감정이 들잖아요.
그런데 상황이 끝나고 집에 가서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해 보면 보통은 후회나 자괴감이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번에도 제대로 싸우지 못했구나, 또 비겁했구나', '항의를 하지 못했구나'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를 괴롭혔던 건 '같은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험난한 세상을 살았던 여성들 그리고
지금보다도 성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훨씬 없었던 세상을 살아낸 여성들의 용기를 좀 빌려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묻고 싶었습니다. 대체 그 용기들이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요.
20~30년대 신문이나 잡지를 조사하다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리즈를 발견했습니다.
제목이 '생활전선에 나선 직업부인순례'라는 제목인데요.
이 인터뷰 기사들에는 당시 직업을 갖고 생활했던 사회생활을 했던 여성들의 인터뷰가 굉장히 생생히 실려있습니다.
그 인터뷰들을 들여다보면 답변들이 정말 호방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인터뷰를 바탕으로 소개한 여성들이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이정옥이라는 사람입니다.
멋있는 차 옆에 늠름하게 서 있는데요. 우리 출연자들이 이 사진을 보고 이정옥의 직업을 추측하는 장면입니다.
뭐일 거 같으세요, 정답이? 이 사람의 직업은 택시기사였습니다. 동양 최초의 여성 택시기사였는데요.
그 시절에 여자가, 처음으로 택시기사가 돼서 취객도 태우고, 장거리 운전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겠어요?
그런 힘든 부분들에 대한 인터뷰가 저희 방송에 담겨있습니다.
시간상 제가 방송에 소개하지 못한 인터뷰가 있어서 잠시 좀 소개해드리려고 가져왔는데요.
잘 안 보이시겠지만 뭐라고 말하고 있냐면
"여간해서는 여자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간혹 운전수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여자들이 있어도
나중에 너의 손으로 경영하기 전까지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하기에 나같은 사람도 하는데 누가 못하겠습니까만. 나는 성공할 때 까지는 계속 이 일을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어요.
성공할 때 까지는 계속 해보겠다 이 말이 굉장히 멋있지 않나요?
저한테 "PD 일 어때?"라고 물어보면 "성공할 때까지는 계속 해보려고 해"라고 말하지 못 할 것 같아요.
근데 제 짐작이지만, 이정옥은 아마도 본인이 최초의 택시 운전사로서 본인의 성공사례가 다른 여성들한테 어떤 의미인지
혹은 어떤 힘이 되는지를 알고 있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이정옥은 이 인터뷰를 하고 6년 후에 본인이 직접 택시회사를 경영하고요.
돈을 많이 벌어서 다른 택시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정옥 외에 이 인터뷰에 등장하는 많은 직업부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어렵긴 하지만 여성으로서 특히 힘든 일이 많긴 하지만 나는 실력으로 보여주겠다" 이 이야기를 공통적으로 합니다.
어찌보면 좀 당연한 결심이긴 한데요. 당시 생활상을 고려해보자면 비장함 같은 것이 좀 느껴지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송이 나가고 SNS상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은 작가 김명순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를 비난했던 남성 문인들이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또 성폭력이나 2차 가해 문제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큰 사회적 이슈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김명순이 그저 성폭력의 피해자거나 혹은 알려진대로 이른바 최초의 '미투운동'을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글을 계속 쓰고 싶어서
고군분투하고 큰 소리로 싸운 문인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프로그램을 보시면 부분 부분 그녀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다 본 시청자가 아주 일부라도 김명순의 글을 찾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명순의 글에는 자전적인 요소가 많다고 해요. 왜냐면 글로써 자신을 변호하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인 본인한테 '타락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소설을 써서 대항하고요.
그녀의 시를 '퇴폐하고 황량한 피부다'라고 비난하는 비평가를 향해서 '김기진의 공개장을 무시함'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고요.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다고 하는 처녀시인' 이런 말도 안 되는 루머를 실은 잡지사를 고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맞서 싸울수록 세상의 비난은 더욱 거세졌던 것 같아요.
그런데 생각을 해 보면 만약 그녀가 그때마다 맞서 싸우지 않았더라면 조금 참았더라면 그 삶이 조금 더 낫고 행복했을까요?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해볼게요.
분명 이 길을 걷는 다른 누군가도 같은 돌에 걸려서 넘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는 여기 돌부리가 있다고 크게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걸 조금이나마 치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감동 받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성백년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100년이 지나서 그들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 있게 돼서 저는 기뻤습니다.
그런 외침들이 세상을 조금씩 나아지게 만들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김명순, 강향란, 송계월 이정옥, 오엽주, 최영숙. '여성백년사'에 등장하는 여성들입니다.
이중 누군가는 정말 여성인권을 위해서 혹은 성평등을 이룩하기 위해서 싸웠겠지만
그에 앞서서 저는 이들이 그저 자기 인생을 잘 살아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능력만큼 인정받고 내가 배우고 싶은 만큼 배우고 싶은 여성들이요.
프로그램에서처럼 그녀들을 제가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나운 세상을 살아낸 여성들을 만나서 한마디 건넬 수 있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처음으로 고맙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살아낸 치열한 시간들이 모여서 지난 100년간 세상을 조금씩 바꿔왔으니까요.
제가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발견한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말 지난하게 느껴지지만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멀고 멀지만 결국은 바뀐다는 것이요.
그리고 내가 내 자리에서 열심히 그냥 그저 주변의 돌부리를 치워가면서 살아가는 이 시간도 그 변화에 포함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물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겠죠. 보일 듯 안 보일 듯 아주 조금씩 바뀌어나갈 겁니다.
'여성백년사' 의 부제목은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입니다.
누군가는 부제목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100년 전에 비하면 엄청 세상이 좋아졌지'라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건 하나인 것 같아요.
우리 미래 세대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 그리고 평등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혹한 세상을 살아낸 여성들의 삶은 그저 슬픔이나 분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남긴 목소리가 100년 후인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큰 의미와 용기, 힘으로 남듯이 지금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앞으로 여러분이 내딛을 작은 발걸음들을 응원하고요.
저도 계속해서 제 자리에서 용기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콘텐츠에 대한 의견은 genderon@kigepe.or.kr 로 보내주시면 콘텐츠 제작 및 활용 시에 참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