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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이, KBS청주 PD) 안녕하세요, 저는 KBS청주에서 다큐멘터리 만들고 있는 박송이 PD입니다.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가 아직 남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제작자 혹은 창작자의 입장에 서 보면 이미 좋은 이야기는 세상에 다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먼저 소재부터가 걱정입니다. 지역방송에서 일하는 저로서는 한반도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부족한데 충북 안에서 충북도민만을 출연자로 하는 이야기라니.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제게 어떤 돌파구가 있을지 늘 고민하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 '양백의 소녀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 소재는 대농방직인데요. 대농방직을 발견하고 '조금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대농방직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방직공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국도 아니고, 아시아 최대 규모의 공장이 청주에 있었다니? 하면서 반가웠죠. 습관적으로 다른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적이 있나 하고 바로 검색해 봤는데 다행히 한 번도 없더라고요.
대농방직은 청주에서 열 가구 중에 세 가구는 관계가 있다고 할 정도로 청주시민들에게, 청주 경제에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곳에서 일했던 8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 역시 잊혀져 가고 있었죠.
그때, 그러니까
대농방직이 가열차게 돌아갔던 70-80년대의 사정을 잠시 소환해보자면
그 힘든 공장에 들어가겠다는 10대, 20대 여성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기도 하고요.방직기계가 워낙 커서 키 제한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발 안에 스티로폼을 넣고, 까치발을 들면서까지 들어가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 공장에 들어가고 싶으셨을까요? 바로, 산업체 부설학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린 여성들이 제 발로 찾아왔죠.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 회사에서 있었던 부정한 일들은 모른 척하기도 했습니다. 회사에서 잘리면, 학교도 다닐 수 없으니까요.
사실, 제가 여공을 소재로 삼았을 때 상상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다가 부당한 사용자에 맞서 싸워서 민주화에 기여하고 노동권을 사수한 멋진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우리가 ‘여공’ 하면 흔히 생각하는 청계노조, 동일방직, YH무역 사건 등이 그런 이야기였죠. 그래서 저는 당시 노동자분들께 찾아가서 파업은 없었는지, 노동조합은 없었는지 성희롱 사건은 없었는지 그런 것만 묻고 다녔습니다.
새로운, 아직 방송에 한 번도 안 나간 소재를 찾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번에는 재밌는 이야기 또는 자극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이미 익숙한 기승전결을 쫓아가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제가 기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그동안 대농방직이 다큐로 만들어지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런 실망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짜 여기서 그만 접어야 하나' 하면서 고민만 깊어 가던 와중에 사전 인터뷰 때 받아놓았던 한 노동자분의 10권의 일기장을 그제서야 좀 읽어보게 됐어요.
정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쓰셨더라고요.
대농방직 시절에 일하며 공부하며 기록한 그 시절의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수많은 좌절과 다짐들이 매일 같이 반복되고 있었죠.
공장에서 혼난 이야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공장 화장실에서 몰래 공부하며 자책하던 날들, 가족들에게 월급을 보내느라 빵 하나 마음껏 사 먹지 못한 설움,
그래도 그 끝에는 견뎌보자는 다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기장 구석에 깜지처럼 영어단어들도 써 있더라고요.
그 일기장을 넘겨보며 이런 반성이 먼저 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공부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거기서 생각이 이렇게 이어지더라고요.
그렇다면 이들에게 공부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투쟁은 아니었을까?
‘공순이’라고, 산업체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 바깥 세상을 향해서 나도 공부할 수 있고 나도 내 꿈을 꿀 수 있다고 외치는 투쟁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들에게는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던 하루하루가 투쟁이고 저항이었습니다.
노동자이기 이전에 학생의 정체성을 최우선으로 두고 꿈을 꾸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한 명 한 명의 소녀들이 그제서야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죠. 단 한 번도 학생의 입장으로 쓰인 적 없는 여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니 전에 없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밤샘근무를 하고서도 저희와 똑같이 수학여행을 가고, 이선희의 'J에게' 노래를 듣고, 남몰래 선생님을 흠모하기도 하고요.
기숙사에 모여서 밤새 수다도 떨고 찬란하기 그지없는 여공들의 학창시절이 펼쳐졌고 꿈을 향한 자주적인 태도가 드러났습니다.
지금까지 들으시면서 아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분들 있으셨을 것 같아요.
제 또래라면 나의 엄마나 이모, 70~80년대를 살아오신 분이라면 친했다가 연락이 뜸해진 친구이거나요.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산업체학교가 전국에 152개, 학생 수 7만여 명에 이를 만큼 활성화된 시절도 있었으니 어쩌면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연들입니다.
다만 우리 중 그 누구도 먼저 물어보지 않았던 궁금해하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
당신에게 어떤 꿈이 있었는지 당신의 학창시절도 역시나 희망차고 아름다웠는지 말입니다.
그동안 주류 역사가 말해왔듯 산업화 성공 신화의 도구 쓰인 여공이 아니라
지역사로서, 여성사로서, 그리고 증언사로서 그 시대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까운 역사로 새로 쓸 수 있었습니다.
시대와 자신의 삶을 교차하며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마주해 왔는지 삶의 딜레마 속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갔는지를 쫓아가면서요.
저는 비로소 저희 출연자였던 명순, 명옥, 연두, 주원님을 비롯한 수많은 양백의 소녀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욕망과 서사와 역사를 가지고 행동해 온 여성이었음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중꺾마'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한참 화두에 올랐는데요.
시대에 맞서서, 좌절에 맞서서 자신의 꿈을 꺾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출연자 분이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과거의 꿈이 되살아나서 얼마 전에 대학교에 입학하셨다고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소녀들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기존의 역사에 빗겨 말해지지 않은 쪽으로 조금 더 귀 기울여 듣는 것. 어쩌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돌파구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제 속에 내재된 편견들과 마주해야 했고요.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한번에 깨달은 듯이 여기서 얘기했지만 오랫동안 쌓여온 편견은 순간순간 다시 튀어나와서 '그 시절엔 다 그랬던 거 아니야?'
'이게 과연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으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더 다양한 주인공이 더 다양한 목소리가 더 다양한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목받지 못한 곳에서 삶의 주체가 되어준 여성들이 또 다른 소수자들이 있기에 아직 숨겨진 이야기가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역방송국의 다큐멘터리 PD로서 그런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더 해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양백의 소녀들'의 주인공이자 또 저에게 영감이 되어주신 출연자분들이 직접 자리해 주셨는데요. 한번 소감을 들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심명옥) 안녕하세요. 그 시절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중학교도 못 가게 되었던 소녀가 세 아이의 할머니가 돼서 서울까지 올라왔습니다.
섭외를 받았을 때 정말 망설였어요. 우리가 그 시절에 불렸던 이름은 '공순이', '여공', '산업 역군'. 그리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이름이 기억나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봤어요. "대농방직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데 이걸 내가 출연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이랬더니 남편이 저한테 용기를 주더라고요.
"당신이 대농방직 시절을 부정한다면 지금까지의 당신 인생을 부정할 수밖에 없어요.” 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그럼 내가 해보겠다고 했죠.
(이주원) 안녕하세요. 저는 옥천에서 올라온 이주원이라고 합니다. 양백여상을 통해서 굉장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갖고 제 생활을 하고 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저한테는 양백여상이 너무 소중하고 우리들의 묻혀 있던 이야기를 꺼내주셔서 감사해요.
(이명순) 안녕하세요, 저는 이명순입니다. 어렸을 때 꿈이 기자였거든요. 다행히도 대농방직에서 운영하는 부설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다는 걸 알고 밤중에 맨발로 쫓아갔어요. 그렇게 중학교를 스물 세 살에 입학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삼십 년 만에 2014년에 대학교 졸업을 했습니다. 끝으로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어요. 젊은 여러분들, 우리들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배우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나요?
(김연두) 안녕하세요, 저는 "엄마, 살려주세요, 너무너무 힘들어요"라고 간절하게 일기를 썼던 김연두입니다. 대농방직에 면접을 보러 갈 때 키가 작으면 면접에서 떨어진다는 선생님 말씀에 스티로폼을 발바닥에 맞게 잘라 양말 안에 넣고 신발을 한 치수 크게 빌려 신고 교복 바지를 빌려 입고 면접 보기 전 날 밤 하늘에 떠 있는 달님에게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돈도 벌고 양백여상에서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요. 삶의 터전이었던 대농 양백여상 멋진 추억이 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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