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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영, 부산일보 기자) 안녕하세요 저는 '제3자가 된 피해자' 기획보도를 한 부산일보 안준영 기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지난해 발생한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많은 분들이 돌려차기 폭행 장면이 담긴 영상이라든가 가해 남성의 뻔뻔한 주장 같은 걸 접해보셨을겁니다.
하지만 왜 피해 여성이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언론과 정치권에 호소해야만 했었는지
아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저희 단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비롯해
당사자가 아닌 제3자로 밀려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겠지만 만일 여러분들이 강력범죄 사건의 피해자가 된다면 사건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여러분들의 피해사실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공감하는 주인공 형사가 무조건 등장할 겁니다.
이 형사는 범죄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피해자들을 힘겹게 설득해가며 몇 달이고 그 사건에 천착해서 결국 범죄 혐의점을 모두 밝혀낼 겁니다.
법정에서는 명백한 증거들에 의해 일종의 정의구현이 이뤄지고 가해자는 감옥에서 아주 비참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저희 취재진이 만났던 현실에서의 강력범죄 피해자들은 우리들의 상상과는 거리가 많이 멀었습니다.
생업을 내팽개치고 증거를 모으며 피해사실을 밝혀내려고 밤낮 없이 뛰어다닌 건 형사나 검사나 수사기관이 아닌 바로 피해자들 본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지난해를 뜨겁게 달궜던 바로 부산 돌려차기 사건입니다.
저희 취재진은 제보를 토대로 해당 오피스텔에서 증언을 수집했고 경찰의 팩트 체크를 거친 뒤 첫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귀가하던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고 용의자는 도주했다는 내용의 단독 보도였습니다.
굉장히 안타까운 사건이었지만 사실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 기자 입장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건씩 발생하는 폭행 사건 중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다음 날 피해자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피해 여성은 저희에게 "나도 모르는 내 이야기가 어떻게 기사로 나가게 된 거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오랫동안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해왔지만 그 전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저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사건의 당사자인 피해자가 누구보다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처럼 범행을 당한 뒤 의식을 잃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수사기관에서 진술 과정 등을 거치면서 피해자가 사건의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상대로 발생한 범죄이기에 그 누구보다 피해자의 알 권리가 우선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30대 남성인 것, 범행 이후 도주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것, 여자친구 집에 숨어있었다는 것, 피해자가 먼저 욕설을 해서 폭행했다는 가해자의 주장, 성범죄가 포함되지 않은 단순 중상해죄만 적용됐다는 사실 등 대부분의 범죄 내용을 저희 기사를 통해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사건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기자보다도 사건에 관한 팩트를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겁니다.
당시 경찰은 "피해자 구제를 위한 절차를 모두 밟았지만 공정한 수사를 위해 구체적인 범죄 사실은 피해자에게 알려주지 않는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에게 가장 필요한 구제 절차는 바로 사건에 대한 알 권리입니다.
많은 피해자들은 베일에 쌓인 가해자들의 잠재적 보복 범죄에 매일 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건 저희가 만난 다른 범죄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여기서는 돌려차기 사건보다는 좀 덜 알려진 '부산 초량동 노래주점 폭행사건'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난해 4월 노래방을 운영하던 60대 점주는 자정 무렵 마감을 하다가 손님으로 방문했던 50대 남성에게 10분간 무차별 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이 여성은 가해자의 바지춤을 부여잡고 "왜 이러냐"고 울부짖었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 대신 발길질이었습니다.
흩어져 가는 정신을 어렵사리 붙잡은 피해자는 카운터에 손을 뻗어 112에 신고를 했고 가해자는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그녀는 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콩팥에서 출혈이 일어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피해 여성의 따님은 엄마의 병간호에 정신없던 이날 새벽 4시 즈음에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가해자와 일행이었다는 한 남성이 다짜고짜 "왜 우리 일행을 경찰서에 구금시켰느냐,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그 순간 따님은 굉장한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부터 엄마에 이어 나까지 보복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는 겁니다.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찰은 "가해자는 이미 구금돼 있는 상황이고 가해자 측의 인적사항은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노래주점을 운영했던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 본인이 아니더라도 여러 경로를 통해 보복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아는데 피해자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가해자의 보복을 두려워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펼쳐지는 거죠.
보도를 이어가면서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대다수의 사건 기사는 수사기관의 브리핑이나 보도자료를 기반으로 쓰여집니다.
제보를 토대로 취재를 하더라도 수사기관의 팩트 확인을 꼭 거치게 됩니다.
한쪽 편에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보도를 하고 피해자가 원치 않는 범죄사실을 알리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가장 편한 방식으로 자리잡은 취재 기법이라는 생각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들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론 보도에서조차 피해자의 목소리는 묻히고 얼토당토않은 가해자의 변명만 수사기관을 통해 확대돼 알려지고는 합니다.
돌려차기 사건의 가해자는 피해자를 오피스텔 CCTV 사각지대로 끌고가 8분간 함께 있었습니다.
가해자는 이 8분간 정신을 잃은 피해자에게 심폐소생술 같은 구조활동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래주점 폭행사건의 가해자 역시 "술값 결제를 착각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다.
돌려차기 사건의 성범죄 사실은 사건 발생 1년만인 항소심에서야 밝혀지게 됐습니다.
피해자가 입고 있던 청바지의 안쪽에서 가해자의 DNA가 검출됐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돌려차기 사건의 경우 여러차례 일종의 '골든타임'이 있었지만
피해자는 이 골든타임을 놓쳤단 사실조차 알 권리가 없었습니다.
법정에서 피해자의 공간은 방청석으로 한정돼 있었습니다.
재판 방청을 하러 온 일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두고 일어난 범죄 행위를 그야말로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피해자는 가해 남성에게 끌려갔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CCTV 영상을
사건 두 달이나 지난 1심 첫 공판이 되어서야 볼 수 있었습니다.
피해 여성은 재판부에
"이 CCTV 영상을 제공해달라" 며
공판 기록에 대한 열람·등사를 요청했지만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한다는 이유 등으로 거절당해야만 했습니다.
피해 여성은 증거 수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해 남성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 정보가 유출돼 보복 범죄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가해 남성은 범행을 저지른 직후 '부산 서면 강간', '서면 강간미수' '강간죄 처벌 형량' 등을 스마트폰에서 검색해봤습니다.
경찰은 포렌식 수사를 통해 이 사실을 알았으나 피해 여성은 무려 1심 선고가 날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가해자는 "그냥 그때 그게 궁금했다"고 말했는데 과연 누가 선뜻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사건 초기, 경찰은 피해자가 입고 있던 속옷에 대해 DNA 감정을 벌였지만 가해자의 DNA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피해 여성 측은 "당시 충격으로 소변 등 이물질이 나와 정확한 조사가 힘들다"고 했지만 이는 묵살됐고 수사기관은 더 이상 성범죄에 대한 수사나 기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돌려차기 사건의 가해자는 대법원에서 징역 20년형을 확정받았고
피해 여성은 지난 2월 김진주라는 필명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사건이 있을 때면 전국의 법원을 찾아다니며 법정 방청석에서 두려워하고 혼자 앉아 있는 피해자들과 연대합니다.
저희 취재진은 진주 씨와 손잡고 국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수사과정에서 피해자가 소외 받지 않도록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수사 관련사항을 의무적으로 통지하도록 법을 개정하자고 요구했습니다.
법무부는 강력범죄 피해자들이 재판기록 열람을 원할 경우 원칙적으로 이를 허용하기로 하는 등많은 법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산시는 피해자들의 일상회복을 돕는 조례를 만들어 내기도 했어요.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부산 돌려차기 사건은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의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범행 전까지만 해도 피해 여성은 남 부러울 것 없었던 프리랜서였습니다.
그러나 묵살 당한 피해자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생업을 제쳐두고 동분서주했고
1,200페이지가 넘는 사건 기록을 스스로 수집했습니다.
사건을 알리기 위해 보복 범죄의 위협을 무릅쓰고 수십 번이나 카메라 앞에 서기도 했죠.
사실 겉으로는 누구보다 강해보이는 여성이지만 여전히 수면 장애로 괴로워하고
특히 혼자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극도의 공포심을 이겨내야만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 드렸던 첫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으신 이후
만일 당신에게 강력 범죄가 발생했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까요?
보도 이후 저희 취재진에게도 정말 많이 쏟아졌던 질문입니다.
저는 피해자가 반드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돌려차기 피해자인 진주 씨처럼 생업을 내팽개치고 증거를 수집할 필요도
보복 범죄의 위협을 무릅쓰고 언론사 카메라 앞에 설 필요도
생전 접하지 않았던 형사소송법 관련 서적들을 직접 파고들 필요도 없다는 겁니다.
피해자는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도 피해자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괴롭고 외롭습니다.
법률적, 사회적 시스템을 촘촘하게 다시 짜서 진주 씨 같은 피해자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범죄 피해자를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일 겁니다.
진주 씨는 다른 범죄 피해자들에게 "살아 남아줘서 정말 고맙다.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 피해자라는 단어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당신도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피해자들을 위한 사법 시스템의 변화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진정한 변화가 이뤄질 때까지 저희 취재진도 보도를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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